2000년 10월, 리눅스 매거진 원고 …

2000년 10월, 리눅스 매거진 원고 …

리눅스 발전의 계기… 원동력(?) 리눅스를 처음 어떻게 만났습니까 ? 그리고, 어디에 쓰는지 ? 그리고, 왜 쓰는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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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지난 얘기부터 꺼내보도록 해보겠다. 1993년 군대에서 막 전역하고 나와서 학교에 놀러 갔다가 원자핵물리를 전공하는 어떤 선배가 졸업논문 쓴다고 좀 도와달라고 해서 밥한끼에 넘어가서 실험실에 앉아서 하안글이나 워드스타인줄 알았는데, ex 라는 편집기로 이상한 것을 입력하고 있는 것을 처음 봤다. 물리과나 수학과가 아니면 유심히 보지 않으면 뭔지 모를 이상한 기호들이 화면에 떠 있고, 확장자도 txt 나 hwp, doc 가 아닌 tex 인 파일들은 하드디스크에서 한 귀퉁이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 선배가 ‘이 파일들이 뭐에요 ?’ 라는 나의 질문에 답 대신 줬던 책은 The TeX Book 라는 책이었고, LaTeX를 ‘라텍스’라고 읽었다가 엄청나게 무식하다는 말도 들었다. – TeX 은 ‘텍’ 이라고 읽고 LaTeX 은 ‘라텍’ 혹은 ‘레이텍’ 이라고 읽는다. 그런데, 당시 도스에서는 문제점이 있었다. 바로 64KB – 640KB 가 아니라 x86 CPU에서 세그먼트 하나의 단위인 64KB – 의 한계를 넘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TeX 파일은 컴파일을 해서 dvi 로 만들어서 그것을 다시 ps 로 변환시켜 인쇄를 해야 하는데, TeX 파일이 조금 커져서 64KB를 넘기면 컴파일이 안되는 것이었다. 나는 그때 좋은 해결책이 있었다. 바로 OS/2 였다. 집에 있는 386 컴퓨터를 학교로 들고 가서 OS/2에서 EMTeX 으로 64KB 가 넘는 파일들도 간단하게 epm 이라는 OS/2 내장 문서 편집기의 도움으로 편집하여 처리하였다. 선배도 OS/2를 깔아서 쓰려고 하는데, 문제점이 있었다. 당시 OS/2 는 AMI 바이오스에서는 키보드 바이오스가 F 버전 이상의 것을 요구했는데, 그 선배의 보드는 8 이었다. 키보드 바이오스가 보드에서 떼어낼 수 있는 것이 대부분이어서 당시에 OS/2 사용자들은 용산이나 청계천에서 바이오스 F 버전을 3천원 정도에 사서 쓰고 있었는데, 선배가 쓰던 보드는 땜질이 되어 있어서 불가능했다. 통신상에서 이리저리 게시판을 뒤지고 다니다가 PC 급에서 기본 메모리 제한을 받지 않는 운영체제 중에 리눅스라는 게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용산으로 뛰어가서 3.5인치 디스켓 60여장에 복사해 왔다. 그전에 학과 서버로 SunOS를 쓰고 있었기 명령어나 그런 것은 그다지 생소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당연히 TeX 도 가져다가 깔고 – TeX 의 글꼴 파일(메타 폰트) 컴파일 하는데만 3일은 걸렸었다. – 쓰기 시작했다. 그때는 텍스트 환경에서만 쓸 수 있었다. X 가 잡히지를 않았었다. X를 띄우고, 그 위에 한텀을 띄워서 한글을 쓸 수 있게 되고, 그러기까지는 거의 1년이 걸렸다. X를 띄우고, Xeyes를 띄워서 마우스를 이리 저리 빙빙 돌리면서 신기하게 바라보기도 하고 … 그러면서 점점 재미를 느끼기 시작했다.

그렇게 쓰기 시작한 리눅스는 8년이 지났다. 처음엔 TeX에서 메모리 제한없이 작업하기 위해서 쓰기 시작했던 리눅스가 지금은 HWP/X R5 도 깔아서 이 글도 쓰고 있고, 가우로 하이텔에 접속하여 글도 쓰고, xmps 로 동영상도 보고, xmms 로 mp3 도 듣고, 허접하지만, 내 웹페이지도 돌리고 있고, 아직은 영어만 되어서 조금 불만이지만, 스타오피스로 2주에 한번씩 있는 세미나 프리젠테이션 자료도 만들어서 발표하고 있다. 거기에 가끔 퀘이크 류의 게임도 하고, 심심할 때면 시스템 부하를 얼마나 버티나 궁금해서 커널 컴파일에서 make -j 옵션을 줘서 시스템 로드가 50을 넘기는 것을 보면서 ‘음 오래 버티는군.’ 이라고 지켜보기도 하고, 특정한 배포판에 얽매이는 게 싫어서 레드햇의 rpm에서 벗어나 데비안도 깔아 보다가 하드 홀랑 날리고, 그나마 /home 은 백업을 해둬서 살리기도 한다. 이런 것은 모두 재미있어서 하고 있는 일이다. GNU 선언문 혹은 성당과 시장을 읽고 눈물을 흘리면서 밤새 흥분에 휩싸여 ‘와 난 리눅스 쓸 꺼야.’ 라고 했다면 난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GNU 선언문을 읽은 건 리눅스를 쓰고 난지 한참 뒤인 1998년 여름방학때였다. 읽고 나서도 별로 감동을 받은 것도 없었다. 그저 ‘음 이런 내용이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을 뿐이었다. 재미난 것을 하다 보니 계속 쓰게 된 것이다.

초등학교 4학년때 Apple II+ 라는 8비트 컴퓨터를 처음 만지면서 컴퓨터를 쓰게 됐지만, 그동안 리눅스만큼 많은 재미와 흥미를 불러 들였던 적은 없었다. 그 ‘재미’ 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라는 것은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커널 해킹이나 VGA 카드 등의 해킹을 통해 드라이버 지원이나 성능향상에 기여하는 재미를 느끼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음악을 듣고, 동영상 보고, 게임하면서 재미를 느끼는 사람도 있을 것이며, 배포판 여러개를 섞어가며 최적의 환경을 만들면서 재미를 느끼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어쩌면 일주일씩 밤새워서 리눅스를 최적화 시키고 난 다음에 rm -rf / 하는 재미로 리눅스를 깔아보는 재미를 가진 사람도 있을 것이다. – 저렇게 깨끗하게 자기 자신을 지울 수 있는 운영체제도 PC 급에선 만져보기 쉽지 않다.

어느 누구도 리눅스를 쓰라고 강요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리눅스 개발에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자기 시간을 쪼개가며 도움을 주고, 아직은 불편한 사용자 인터페이스를 개발하기 위해서 노력하고 … 그런 일들을 하는 것을 왜 그러느냐고 한마디로 줄인다면 “재미가 있어서” 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람은 고통, 분노, 힘듦 등은 어떻게든 참을 수 있지만, 심심하다는 것은 어떻게 해볼 수가 없다. 고통이 있으면 아프다고 소리라도 지를 수 있고, 화가 나면 책상에 있는 마우스라도 집어 던질 수 있고, 힘든 일은 투덜거리기라도 할 수 있지만, 심심할 때는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리눅스는 그러한 심심함을 이길 수 있는 “재미있는 무엇”이다. 그 무엇이 장난감이 될 수도 있고, 도구가 될 수 있으며, 어떤 일거리일 수도 있다. 리눅스를 쓰면서 많은 재미를 느꼈었다. 커널이 새로 나오면 어떻게 하면 덩치를 줄여서 메모리 1byte 라도 더 쓰게 할까 하면서 커널 컴파일 수십번 해 보기도 하고, X윈도에서 글꼴 바꿔 보려고 설정파일 수십번 뒤지고, 사운드 카드에서 소리 나게 하려고 OSS, ALSA 등을 이 잡듯이 뒤지면서 찾아내서 그 사용법을 공유하고, 다른 사람들은 앞서간 사람들의 잘못된 점을 바로 잡고, 더 발전 시켜서 더 편하고 좋게 개발하고… 그러면서 리눅스는 더 쓰기 편하고 강력해졌다고 본다. 재미를 느껴서 리눅스를 쓰게 되고, 쓰면서 불편한 점을 편하게 고치기 위해 노력하고, 그러면서 리눅스는 더 발전하게 될 것이다. 그것이 바로 리눅스의 매력이고, 리눅스 발전의 원동력이다. 단순히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재미”라는 것 말이다.

——— 이랬었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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