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 미국 병원 이야기 …

2003년 … 미국 병원 이야기 …

2003년에 여름에 미국에 실험하러 몇달 정도 간 적이 있었다.

한달반쯤 지나서 … 실험실에서 과로 등으로 인해서 쓰러져서 911 불러서 그 근처 community hospital (말이 그럴 듯 하다만, 그냥 동네 병원이다.) 에 갔다. 2일간 입원했고, 별다른 조치를 받은 것도 없이 나왔다. 내가 병원에서 치료 받은 내역은 수액 몇개 맞은 것과, 침대에 누워서 심전도 검사 받은 것, 2,3 시간 마다 체온 잰 것, 그리고 밥 3끼 먹은 것이 전부다. – 실려간 날 저녁, 다음날 아침, 점심 – 점심 먹고 나니 의사가 와서 나가도 좋다고 해서 나왔다.

그리고 일주일 후에 2만 1천달러가 넘는 영수증을 받았다. 난 AIG 보험에 가입해 있었고, 보험사에 연락했다. 그런데, 보험사에서 말하길 … 내가 가입해 있는 보험으로는 1천 몇백달러 밖에는 보증이 안된단다. 나머지 2만 달러는 나보고 내란다. 자기네들과 계약한 지정병원에서만 보험 적용이 되며, 가장 가까운 지정병원은 60 마일 떨어진 곳에 있었다. 한달에 100 달라 넘게 내는 거였는데…

영어 사전 쌓아놓고 보험 계약서 쭉 펼쳐놓고 공부해가며 안되는 영어로 싸웠다. ….

한국 AIG 는 배째더라… 미국 AIG 도 마찬가지. 자기네와 계약하지 않은 병원으로 갔으니 내가 임의로 간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기본적인 치료(응급실에서 혈압재고, 동공이 열렸는지 등 검사하고, 수혈에 대비해서 혈액형 검사한 것 등 몇가지)에 대한 1천 몇백달러 어치는 지급 가능하지만, 그 외에는 내가 내야 한단다.

한국으로 돌아와서도 편지로 계속 싸웠다. 나중에 그 병원에서 미국 채권 추심기관으로 넘겨버려서 2천 몇백달러되는 수수료(+ 이자) 까지 요구했다.

해결까지는 약 1년이 걸렸고, 많은 이들의 도움이 있었다. 결국 채권 추심기관 비용 2천 달러는 내가 지불하고, 2만 달러는 AIG 에서 지급하는 것으로 합의 봤다. – 변호사 말로는 그 2천달러도 안낼 수 있다고 했지만, 그러면 기간이 길어져서 변호사에게 내야 할 돈이 더 많아질 것이라고 해서 그냥 변호사비 낸 것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그러니깐 정리하자면, 2일간 입원해서 수액 몇개 맞고, 심전도 검사 받고, 체온 몇번 재고, 밥 3끼 먹은 게 2.3 만 달러짜리다. 이게 미국 선진국식 의료다.

이때 얻은 것으로는 .. 영어실력을 들 수 있을 거다. 1년쯤 영어로 싸우니깐 토익 605 점 받는 영어실력이 영어로 논문 쓰고, 컨퍼런스에서 발표하고, 미국 드라마를 자막없이도 잘 보게 되었다.

변호사 얘기를 좀 더 쓰자면 … 미국에서 병원에 입원하고 보험사와 컨택을 하려니 개인으로는 불가능하고 변호사가 있어야 한다고 한다. 변호사가 필요하다는 말에 일단 비용에 대해서는 겁을 집어 먹었지만, 별 수 없지 않나 ? 흥미로운 건 병원에서 변호사를 섭외해준다는 점이었다. 연락처 몇개를 받았고, 변호사 세명과 연락이 됐다. 그리고 … 그 중 한명과 계약을 했다. 계약 조건은 너무 오랜 시간이 지나서 기억은 안나는데, 한국식으로 변호사 선임비 몇백만원 … 성공 보수 얼마 … 이런 게 아니라, 문서 작성 한건당 얼마 .. 법률 검토 시간당 얼마 .. 이런 식이었다.

세명중 한명은 교통사고 전문 변호사 .. 두명이 의료사고 전문 변호사인데, 사무실 두곳에 가서 얘기해보고는 덜 바빠 보이는 변호사와 계약했다.

800페이지가 넘어가는 영문 계약서를 다 뒤졌다. 그리고, 거기서 계약하지 않은 병원에 임의로 갔을 경우에는 기본적인 치료에 대해서만 지급 가능하고, 그 이상은 보험에서 지급하지 않지만, 각종 천재지변이나 테러, 또는 사고 등으로 인하여 계약자가 의식이 없는 상태에서 병원에 갔고, 역시 계약자가 인지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수행된 의료행위에 대하여 지불된 금액은 보험사에서 지급한다는 단서 조항을 찾아냈다. 그리고 이 조항을 근거로 1년 가까이 보험사와 e-mail, 편지, 팩스를 주고 주고 받으면서 싸웠고, 결국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2만 달러는 보험사에서 지급하고, 채권 추심기관 비용 2천 달러는 내가 지불하는 것으로 했으며, 변호사비는 그보다 적게 나왔다. 1년 내내 싸웠을 것 같지만 … 내가 이런 저런 내용을 변호사에게 e-mail 로 적어서 보내면 변호사가 각종 법률적 용어로 바꿔서 다시 나에게 보내고, 내가 그걸 검토해서 그대로 보내자… 고 하면(내가 영어로 법률 용어를 뭘 알겠나 … 사전 찾아보고 그랬던 거지… ) 그 내용을 변호사는 인쇄해서 보험사로 보내고 … 그러면 한달쯤 있다가 .. 또는 두달쯤 있다가 보험사에서 그 내용을 증명해라.. (그러니깐 의식이 없었다.. 거나.. 뭐 이런 거..) 라고 연락이 오면 병원에 연락해서 진단서 보내달라고 하면 병원에서 진단서가 나한테 일주일이나 보름쯤 있다가 오면 나는 그 진단서를 스캔해서 일단 변호사에게 보내주고, 원본을 다시 국제우편으로 미국으로 보내면 또 며칠 있다가 변호사는 받아서 편지 써서 보험사로 보내고 … 그걸 몇차례 한 거고 그렇게 마무리 됐다.

2000년 10월, 리눅스 매거진 원고 …

2000년 10월, 리눅스 매거진 원고 …

리눅스 발전의 계기… 원동력(?) 리눅스를 처음 어떻게 만났습니까 ? 그리고, 어디에 쓰는지 ? 그리고, 왜 쓰는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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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지난 얘기부터 꺼내보도록 해보겠다. 1993년 군대에서 막 전역하고 나와서 학교에 놀러 갔다가 원자핵물리를 전공하는 어떤 선배가 졸업논문 쓴다고 좀 도와달라고 해서 밥한끼에 넘어가서 실험실에 앉아서 하안글이나 워드스타인줄 알았는데, ex 라는 편집기로 이상한 것을 입력하고 있는 것을 처음 봤다. 물리과나 수학과가 아니면 유심히 보지 않으면 뭔지 모를 이상한 기호들이 화면에 떠 있고, 확장자도 txt 나 hwp, doc 가 아닌 tex 인 파일들은 하드디스크에서 한 귀퉁이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 선배가 ‘이 파일들이 뭐에요 ?’ 라는 나의 질문에 답 대신 줬던 책은 The TeX Book 라는 책이었고, LaTeX를 ‘라텍스’라고 읽었다가 엄청나게 무식하다는 말도 들었다. – TeX 은 ‘텍’ 이라고 읽고 LaTeX 은 ‘라텍’ 혹은 ‘레이텍’ 이라고 읽는다. 그런데, 당시 도스에서는 문제점이 있었다. 바로 64KB – 640KB 가 아니라 x86 CPU에서 세그먼트 하나의 단위인 64KB – 의 한계를 넘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TeX 파일은 컴파일을 해서 dvi 로 만들어서 그것을 다시 ps 로 변환시켜 인쇄를 해야 하는데, TeX 파일이 조금 커져서 64KB를 넘기면 컴파일이 안되는 것이었다. 나는 그때 좋은 해결책이 있었다. 바로 OS/2 였다. 집에 있는 386 컴퓨터를 학교로 들고 가서 OS/2에서 EMTeX 으로 64KB 가 넘는 파일들도 간단하게 epm 이라는 OS/2 내장 문서 편집기의 도움으로 편집하여 처리하였다. 선배도 OS/2를 깔아서 쓰려고 하는데, 문제점이 있었다. 당시 OS/2 는 AMI 바이오스에서는 키보드 바이오스가 F 버전 이상의 것을 요구했는데, 그 선배의 보드는 8 이었다. 키보드 바이오스가 보드에서 떼어낼 수 있는 것이 대부분이어서 당시에 OS/2 사용자들은 용산이나 청계천에서 바이오스 F 버전을 3천원 정도에 사서 쓰고 있었는데, 선배가 쓰던 보드는 땜질이 되어 있어서 불가능했다. 통신상에서 이리저리 게시판을 뒤지고 다니다가 PC 급에서 기본 메모리 제한을 받지 않는 운영체제 중에 리눅스라는 게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용산으로 뛰어가서 3.5인치 디스켓 60여장에 복사해 왔다. 그전에 학과 서버로 SunOS를 쓰고 있었기 명령어나 그런 것은 그다지 생소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당연히 TeX 도 가져다가 깔고 – TeX 의 글꼴 파일(메타 폰트) 컴파일 하는데만 3일은 걸렸었다. – 쓰기 시작했다. 그때는 텍스트 환경에서만 쓸 수 있었다. X 가 잡히지를 않았었다. X를 띄우고, 그 위에 한텀을 띄워서 한글을 쓸 수 있게 되고, 그러기까지는 거의 1년이 걸렸다. X를 띄우고, Xeyes를 띄워서 마우스를 이리 저리 빙빙 돌리면서 신기하게 바라보기도 하고 … 그러면서 점점 재미를 느끼기 시작했다.

그렇게 쓰기 시작한 리눅스는 8년이 지났다. 처음엔 TeX에서 메모리 제한없이 작업하기 위해서 쓰기 시작했던 리눅스가 지금은 HWP/X R5 도 깔아서 이 글도 쓰고 있고, 가우로 하이텔에 접속하여 글도 쓰고, xmps 로 동영상도 보고, xmms 로 mp3 도 듣고, 허접하지만, 내 웹페이지도 돌리고 있고, 아직은 영어만 되어서 조금 불만이지만, 스타오피스로 2주에 한번씩 있는 세미나 프리젠테이션 자료도 만들어서 발표하고 있다. 거기에 가끔 퀘이크 류의 게임도 하고, 심심할 때면 시스템 부하를 얼마나 버티나 궁금해서 커널 컴파일에서 make -j 옵션을 줘서 시스템 로드가 50을 넘기는 것을 보면서 ‘음 오래 버티는군.’ 이라고 지켜보기도 하고, 특정한 배포판에 얽매이는 게 싫어서 레드햇의 rpm에서 벗어나 데비안도 깔아 보다가 하드 홀랑 날리고, 그나마 /home 은 백업을 해둬서 살리기도 한다. 이런 것은 모두 재미있어서 하고 있는 일이다. GNU 선언문 혹은 성당과 시장을 읽고 눈물을 흘리면서 밤새 흥분에 휩싸여 ‘와 난 리눅스 쓸 꺼야.’ 라고 했다면 난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GNU 선언문을 읽은 건 리눅스를 쓰고 난지 한참 뒤인 1998년 여름방학때였다. 읽고 나서도 별로 감동을 받은 것도 없었다. 그저 ‘음 이런 내용이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을 뿐이었다. 재미난 것을 하다 보니 계속 쓰게 된 것이다.

초등학교 4학년때 Apple II+ 라는 8비트 컴퓨터를 처음 만지면서 컴퓨터를 쓰게 됐지만, 그동안 리눅스만큼 많은 재미와 흥미를 불러 들였던 적은 없었다. 그 ‘재미’ 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라는 것은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커널 해킹이나 VGA 카드 등의 해킹을 통해 드라이버 지원이나 성능향상에 기여하는 재미를 느끼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음악을 듣고, 동영상 보고, 게임하면서 재미를 느끼는 사람도 있을 것이며, 배포판 여러개를 섞어가며 최적의 환경을 만들면서 재미를 느끼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어쩌면 일주일씩 밤새워서 리눅스를 최적화 시키고 난 다음에 rm -rf / 하는 재미로 리눅스를 깔아보는 재미를 가진 사람도 있을 것이다. – 저렇게 깨끗하게 자기 자신을 지울 수 있는 운영체제도 PC 급에선 만져보기 쉽지 않다.

어느 누구도 리눅스를 쓰라고 강요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리눅스 개발에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자기 시간을 쪼개가며 도움을 주고, 아직은 불편한 사용자 인터페이스를 개발하기 위해서 노력하고 … 그런 일들을 하는 것을 왜 그러느냐고 한마디로 줄인다면 “재미가 있어서” 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람은 고통, 분노, 힘듦 등은 어떻게든 참을 수 있지만, 심심하다는 것은 어떻게 해볼 수가 없다. 고통이 있으면 아프다고 소리라도 지를 수 있고, 화가 나면 책상에 있는 마우스라도 집어 던질 수 있고, 힘든 일은 투덜거리기라도 할 수 있지만, 심심할 때는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리눅스는 그러한 심심함을 이길 수 있는 “재미있는 무엇”이다. 그 무엇이 장난감이 될 수도 있고, 도구가 될 수 있으며, 어떤 일거리일 수도 있다. 리눅스를 쓰면서 많은 재미를 느꼈었다. 커널이 새로 나오면 어떻게 하면 덩치를 줄여서 메모리 1byte 라도 더 쓰게 할까 하면서 커널 컴파일 수십번 해 보기도 하고, X윈도에서 글꼴 바꿔 보려고 설정파일 수십번 뒤지고, 사운드 카드에서 소리 나게 하려고 OSS, ALSA 등을 이 잡듯이 뒤지면서 찾아내서 그 사용법을 공유하고, 다른 사람들은 앞서간 사람들의 잘못된 점을 바로 잡고, 더 발전 시켜서 더 편하고 좋게 개발하고… 그러면서 리눅스는 더 쓰기 편하고 강력해졌다고 본다. 재미를 느껴서 리눅스를 쓰게 되고, 쓰면서 불편한 점을 편하게 고치기 위해 노력하고, 그러면서 리눅스는 더 발전하게 될 것이다. 그것이 바로 리눅스의 매력이고, 리눅스 발전의 원동력이다. 단순히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재미”라는 것 말이다.

——— 이랬었군요.

모든 것은 시간이 걸린다.

모든 것은 시간이 걸린다.

Case 1.

1609년 갈릴레이는 우연히 당시로서는 최신 기술의 산물이었던 망원경을 접한다. 그리고 그것을 하늘을 보는데 적합하도록 개량했고, 1609~1610년에 걸쳐서 밤하늘을 관찰해서 목성의 위성을 발견했다.

이것은 모든 천체는 지구를 중심으로 돈다는 천동설을 부정하는 것이 되었고, 갈릴레이는 유명인이 되어 알려진 것과는 다르게 1611년에는 당시 교황이던 바오로 5세도 접견했고, 신에 대한 복종의 뜻으로 교황에게 무릎을 꿇는 격식도 면제 받을 정도로 교황은 갈릴레이를 극진히 대접했다.

그러나 … 1년이 지나지 않아서 분위기는 바뀐다. 그때쯤 이미 도미니코회의 어느 수사는 종교재판소에 그를 고발하기까지 하지만 일단 혐의없음으로 판결난다. 하지만, 계속해서 분위기는 다르게 흘러갔다.

그때는 한참 종교개혁으로 인하여 신교와 구교간의 싸움이 있던 시절이다. 그래서인지 이탈리아의 분위기는 점점 보수적인 방향으로 흘러갔지만, 여전히 갈릴레이는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가르치고 퍼뜨렸다. 물론 조심은 하면서 … 

1623년에 교황이 바뀐다. 우르바노 8세가 선출됐고 우르바노 8세와 갈릴레이는 친한 사이였다. 교황 취임식에도 참여하고 선물도 받는다. 하지만, 10년쯤 지나서 1633년 갈릴레이는 종교재판소에서 유죄판결을 받는다. 물론, 고령 + 건강이 안 좋다. 라고 해서 3년짜리 가택연금을 받는다.  종교재판에서 유죄를 내린 사람은 우르바노 8세다.

그에 앞서서 코페르니쿠스는 1543년에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 라는 책을 내고 그 책에서는 지동설을 주장한다. 그 책은 1616년에 로마 카톨릭에 의해서 금서가 되기전까지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물론, 당연히 갈릴레이도 그 책을 봤다.

코페르니쿠스가 지동설을 주장하기 시작했던 16세기 중반부터 지동설은 널리 퍼지기 시작했지만, 거의 90년뒤인 1633년에 갈릴레오는 성경과 다른 주장을 했다는 죄로 유죄판결을 받는다. 

Case 2.

1859년 “찰스 다윈”은 종의 기원을 출간한다. 그리고, 170년쯤 지난 지금은 정설이다. 그러나, 아직도 극히 일부 기독교 신자들은 진화론을 부정하고 있다. 

Case 3.

뉴튼은 1687년에 첫판이, 1726년에 3판이 출판된 “프린키피아” 라는 책을 출판한다. 그전까지 지배적이던 아리스토텔레스 역학을 뒤엎은 책이다. 하지만, 21세기가 되고도 16년이 지난 지금도 무거운 것이 가벼운 것에 비하여 먼저 떨어진다는 식의 생각을 하는 사람은 여전히 많다. 주로 무협지 등에서 등장하는 천근추 등이 그 예다. 천근추를 쓰면 공중에서 급강하할 수 있다는 설정인데, 자유 낙하 속도는 질량과는 상관이 없다는 것은 과학적 사실이지만, 여전히 그것을 못 받아들이는 사람은 많다.

Case 4.

1920년대 말에 있었던 솔베이 학회 이후 양자역학은 과학의 기본(쉽다는 얘기가 아니라 base 가 된다는 얘기다.)이 되었다. 하지만, 90년 가까이 되어 가는 현시점에서 양자역학을 이해하는 사람은 인구의 1% 도 안된다.

다시 Case 1.

그렇다면 어떻게 지동설은 천동설을 이겼을까 ?

천동설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죽었기 때문이다. 천동설을 지지하던 사람들 중 상당수는 당시 로마 카톨릭에서 한자리씩 차지하고 있던 사람이었고, 그들에게 지동설을 인정한다는 것은 자신의 기반을 부수는 일이었고, 과학적으로 옳고 그름을 떠나서 자기 자리에 위협이 되기 때문에 천동설을 지지하고 지동설을 부정했었다. 그리고, 세대가 몇번 바뀌면서 그런 사람들이 죽고 난 뒤에야 지동설은 천동설을 대체하고 주류가 되었다. 하지만 .. 여전히 평평한 지구를 주장하는 부류라든가, 성경에 의하면 지구는 평평하다.. 라는 뻘소리를 하는 사람들은 있다. 하지만 극소수다.

그렇다면 왜 카톨릭에서 천동설을 지지(?)했을까 ? 이건 좀 복잡한 종교적 이유가 있다.

천동설에 의하면, 지구는 우주의 중심이고, 지구를 중심으로 태양과 달, 태양계 내의 각 행성을 비롯한 별이 돌고 있는 구조다. 반면에, 지동설에서는 지구는 우주의 중심이 아니고, 태양을 중심으로 돈다. 더 발전된 지동설에서는 태양 역시 우주의 중심이 아니고 우주에는 무수히 많은 태양이 있고, 그 태양을 도는 지구 같은 행성이 있다.는 것이 지동설이다.

이게 당시에 문제가 된다. 왜 ? 신은 우주 만물을 창조하셨고, 지구에 독생자 예수를 보내셔서 구원을 하셨다. 그런데 … 지동설에 따르면, 우주에는 무수히 많은 지구가 있을 수 있다. 그런데, 예수는 독생자다. 다른 지구에는 예수가 없다. 그렇다면 다른 지구에 있을 수 있는 사람(외계인 …)은 어떻게 구원을 받는가 … 그렇다면 다른 태양계에 있는 지구마다 예수가 있어야 한다… 그런데 그렇다면 독생자가 아니다… 이렇게 모순이 생긴다. 이러한 모순을 없애려면 우주의 중심은 지구라고 믿는 게 … 간단하다.

이런 이유로 갈릴레이는 “종교재판”을 받았던 것이다. 그런데 … 지금도 저렇게 믿는 사람들이 있다… 

다시 Case 2.

진화론을 부정하면서 창조론(또는 그들이 얘기하는 창조과학)을 믿는 사람들은, 지금 그들이 얘기하고 있는 창조론이 그들이 그토록 싫어하는 이단인 제칠일안식교에서 나온 거라는 사실을 알기는 할까 ?

다시 Case 3.

오죽하면 세계에서 가장 큰 진공챔버에서 진공을 뽑고 깃털과 쇠구슬을 떨어뜨리는 실험까지 했을까 ?

다시 Case 4.

까놓고 말해서 이걸 이해한다고 얘기하는 사람의 95% 이상은 뻥치는 거다… 나도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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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언가를 바꾼다는 것은 매우 어렵다. 겉으로 보기에는 어느 한 순간에 바뀌는 것 같지만, 아주 결정적인 계기가 있지 않다면 한번에 바뀌는 것은 없다. 그런데, 사람들은 한번에 모든 것을 바꾸려고 한다. 그래놓고는 자기가 생각하는 게 안됐다고 실망하고 좌절하고 그에 대한 반작용으로 엉뚱한 데로 튀어버린다. 마치 지동설을 이해하지 못하니깐 남극은 높은 얼음산이고 NASA 직원들이 접근을 못하게 막고 있다고 주장하는 평평한 지구 협회 사람들처럼 … 

변혁이니 혁신이니 패러다임 쉬프트니, 변화니 하는 것들은 말은 그럴싸하다. 하지만, 그것이 어느날 짠.. 하고 되는 경우는 없다. 아인슈타인 상대성이론이 나온지는 100년이 됐지만, 그것이 입증된 건 100년이 지나서 중력파가 발견되면서다. 그때까지는 조금씩 조금씩 전진하는 거다.

현재 쓰이는 “패러다임” 이라는 말의 뜻은 토마스 쿤이 “과학혁명의 구조”라는 책을 1962년에 내면서 쓰이기 시작했다. 저 책에서 언급하기 전의 뜻과 지금의 뜻은 상당히 다르다. 

토마스 쿤은 저 책에서 공약불가능성 (영어로는 incommensurable)를 주장한다. 한번에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과거에 존재하던 패러다임을 대체할 수 있는 패러다임이 나오면 과거의 패러다임은 사라지고(또는 용도 폐기되고) 새로 등장한 패러다임이 그 자리를 차지한다는 것이다. 지금도 열심히 논쟁이 벌어지고 있는 주제이다. 

문제는 이게 딱딱 나누어떨어지지 않고 있고 그게 논쟁의 한 축이다. 예를 들자면 토마스 쿤이 주장한 공약불가성에 따른다면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이 나오면서 뉴튼의 고전역학은 폐기되어야 하지만, 여전히 일상적인 환경, 거시적인 환경에서 아주 빠르거나 무거운 물체/물질이 아니라면 뉴튼역학을 계산하든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으로 계산하든 오차범위 내에서 거의 같은 결과를 얻는다.

다시 말하지만, 무언가가 바뀐다는 것은 말처럼 쉽게 바뀌는 것이 아니다.  아이폰이 어느날 짠… 하고 나와서 “혁신”의 아이콘이 됐을까 ? 천만에… 그 이전에는 아이튠즈가, 그 이전엔 아이팟이, 그 이전엔 뉴튼 PDA 가, 그 이전엔 넥스트스텝이, 그 이전엔 매킨토시가, 그 이전엔 리사가, 그 이전엔 애플 3, .. 애플 2… 부터 쌓여온 게 집합되어 나온 게 아이폰이다. 거의 30년이 걸려서 나온 거다. 

어느 한순간에, 한번에 바뀌는 건 없다. 한번에 무언가를 바꿀 수 있다는 사람은 사기꾼이다. 혹은 전지전능한 신이거나 ..

기술 개발 과제 – 거의 끝나간다.

2021년 6월 중순에 시작해서 2022년 6월 중순에 끝나는 1년짜리 작은 기술개발과제가 하나 있다. 이제 2주일 정도 남아서 끝나가는 절차를 진행하고 있는데, 완료 보고서 크기가 대략 310메가바이트, 기술임치 자료가 550메가바이트를 넘겼고, 심지어 수요기업 품질 보고서 파일 크기가 52메가바이트이다. 대충 hwp 로 130쪽, 파워포인트로 70쪽을 넘어가고 있다. 내일 정도까지 해서 내용은 모두 채우고 글꼴 맞추고 목차 꼬인 것 좀 정리하면 얼추 다음주 중반이면 끝잘 것 같다.

히유 .. 이렇게 또 하나 끝나간다…

컴퓨터 – 프로그래밍 언어

내가 처음 접한 컴퓨터 언어는 애플 소프트베이식이다. (당시에는 BASIC 을 베이식이라고 읽지 않고 베이직이라고 읽었었다.)

애플 II 프로그래밍 500제 라는 제목으로 기억하고 있는데, 말 그대로 예제가 500개쯤 들어 있는 책이었다. 그 책으로 컴퓨터 프로그래밍을 처음으로 접했다.

컴퓨터를 보유하고 있는 친구네나 친척들은 애플II 보다는 MSX 나 IQ1000 가 많았었고, 그 외에도 호환 기종들이 많이 있었다. 우리집에 있던 애플II도 청계천 호환 제품이었다.

어떤 아이들은 컴퓨터 학원도 다니고 했지만, 오로지 나는 저 책 한권으로 스스로 배웠다. 어쩌다가 보게 되는 컴퓨터 잡지는 저 책에서 얻지 못하는 지식을 얻을 수 있는 몇 안되는 기회였다. 주로 컴퓨터 관련 지식을 접할 수 있는 곳은 제물포역 지하 상가에 있던 파인 시스템이라는 곳이었는데, 컴퓨터 제품을 팔기도 했고, 실제로는 게임을 테이프나 플로피 디스켓에 복사해서 팔던 곳이었다.

중학교에 들어간 이후, IBM 호환기종을 처음 접하였다. 그리고, 몇몇 언어들을 배웠다. Cobol 도 어느 정도 배웠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고, 중2 여름 방학때는 그걸로 시험 점수를 입력하면 자동으로 계산해서 평균과 등수를 출력하는 프로그램을 만들어서 학교에서 쓰기도 했었다. (당연히 선생들은 나를 못 믿고 주판으로 또는 손으로 다시 계산해서 성적을 매겼다.)

고등학교 들어가서는 프로그래밍 보다는 게임을 주로 했었다. 집에 있는 애플II는 이미 유행을 어느 정도 지났고, 컴퓨터 잡지에서는 애플II 얘기보다는 IBM 호환 기종들에 대한 내용이 주를 이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완전히 손을 뗀 건 아니었고, 학교 컴퓨터실에 있는 메모리 256KB짜리 컴퓨터들로 GW-BASIC 으로 이런 저런 것들을 짜곤 했었다. 하지만, 고2 2학기때부터는 대입을 위한 공부를 하기 시작하면서 컴퓨터는 잠시 봉인을 했다.

대학교에 들어가서 다시 컴퓨터를 꺼냈고, 대학교 입학 선물로, 386 컴퓨터를 한대 받았다. 무려 모뎀도 달려 있었는데, 이것은 새로운 세상과 만나게 해줬다. 이때부터 다시 몇몇 언어들을 공부했고 주로 당시에는 클리퍼와 Quick-BASIC 을 썼었다. 왠지 C는 다루기 싫었었다. (라기 보다는 포인터 부분에서 좌절하고 반쯤 포기했었다는 게 맞을 거다.)

그리고, 중/고등학교때 상업(남자학교에서는 주로 공업이나 기술과목이었는데, 내가 다닌 학교에서는 상업이었다.) 과목에서 배운 내용으로 남동공단이나 주안공단에 있는 작은 업체들의 전산망에서 요새로 말하면 ERP 고, 실제로는 당시 손으로 쓰던 장부를 컴퓨터로 쓰는 정도의 프로그램을 만들어서 싸게는 몇만원, 비싸게는 20만원쯤에 팔았고, PC 통신에서 알게된 형의 소개로 당구장 관리 프로그램, 비디오 가게 관리 프로그램 등을 제작해서 팔았었다. 그리고 그 돈으로 등록금과 생활비를 마련할 수 있었다.

대학 1학년 마치고 입대를 했는데, 이병에서 일병으로 넘어갈 때쯤 대대 컴퓨터를 관리하게 됐는데, 그때도 클리퍼로 예비군 관리 프로그램을 짜서 돌렸었다. 하지만, 몇달 뒤에 보안 규정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삭제 당하고 영창에 갈 뻔 하기도 했었다.

군복무 후 복학한 후 어느 실험실에 들어가서 이것저것 잡일(…)을 하면서 계산용으로 포트란을 배웠고, 각종 측정장치에서 GPIB(IEEE-488.2 interface) 를 통해서 데이터를 가져오는 것을 C 언어로 작성하는 것을 했었다. 간단한 프로그램 몇개 짜주고 주로 대학원 선배들에게 밥한끼 얻어 먹고 … 그랬었다. 그러다가 대학원으로 갔고, 여전히 GPIB를 통해 데이터를 받아서 그것을 포트란이나 C 언어 등으로 가공해서 데이터를 추출하는 것을 주로 했다.

그리고, 그렇게 데이터를 받아와서 가공하는 것을 계속했고, 그것을 바탕으로 회사도 들어갔고, 지금까지도 어찌 보면 그 일을 계속 하고 있다. 다만, x86 에 ISA 또는 PCI 슬롯에 꽂혀 있는 GPIB 를 통해서 각종 센서나 측정 장치에서 데이터를 받아오던 것을 x86 또는 라즈베리파이 류의 IoT device 에서 USB 나 GPIO 로 센서나 측정 장치와 연결해서 데이터를 받아오고 있고, 데이터는 텍스트 파일로 저장하던 것을 MySQL 이나 MariaDB 같은 데이터베이스로, 센서에서 데이터 읽어오는 프로그램은 주로 C 나 LabView 로 하던 것을 파이썬으로, Origin 으로 하던 데이터 처리는 엑셀이나 R 로 하는 정도가 바뀐 거라면 바뀐 거다. 여전히 그래프는 Origin 이 이쁘게 잘 그리기 떄문에 엑셀이나 R 에서 처리된 데이터를 다시 origin 으로 넘겨서 그래프 그리는 용도로는 계속 쓰고 있지만, data fitting 이나 노이즈 제거 같은 것들은 데부분 파이썬이나 R 로 하고 있다.

6월 20일 정도까지 지금 다니는 회사를 다니고, 그 이후에는 다른 회사로 옮길 예정이다. 이 회사에 와서 작성한 자료중 저런 데이터 처리와 프로그래밍에 대한 것들이 34GB 가 나와서 깜짝 놀랐었는데, 리눅스에서 .cache, .vscode-server, .local 처럼 각종 잡다한 임시 파일(?)을 저장하는 곳을 제외하고 다시 보니 DB, 웹 포함해서 1.5GB 나온다. (vscode 와 pip 로 설치한 python 모듈 임시 파일이 얼마나 많은 거냐 …)

저게 잡다한 임시 파일들과 hwp, ppt, xls 등의 문서파일들을 제외한 순수한 데이터 처리와 관련된 자료의 용량이다. (문서 파일이 저장되는 계정은 swlee 가 아니다.)

나는 자료구조나 앨거리듬 … 이런 것을 정식으로 배워본 적이 없다. 학교 다닐 때 컴퓨터 공학과 강의 듣다가 윈도우 95가 완벽한 32비트 운영체제라는 교수의 말에 욱해서 (당시에 나는 OS/2 를 쓰고 있었다.) 한바탕 해서 F 맞은 뒤로는 그쪽은 쳐다도 안 보고 내가 책을 찾아 가면서 필요한 게 있으면 그때 그때 찾아보면서 했다. 지금도 파이썬으로 뭔가 할 때또 웹 브라우저로 계속 검색하면서 작업한다. 그런데 … 어찌 보면 그게 내가 하는 업무의 1/3 쯤은 되는 것 같다.

Restart

기존에 설치되어 있던 OS가 CentOS 6.x 였는데, 지원 끊긴지도 오래 됐고, 근근히 버티다가 얼마전에 ssh 가 버전업되면서 오래된 프로토콜에 대한 지원이 하나둘씩 끊기고 있어서 이러다가는 원격 접속도 안되겠다.. 라는 생각이 들어서 2022년 5월 14일에 Ubuntu 22.04 LTS 버전으로 운영체제를 재설치하였음.